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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빛이 저무는 성전, 믿음의 폐허에서 다시 세워지는 것들

이시연(독립큐레이터)

우리의 믿음은 얼마나 견고한가? 황량한 확신과 알량한 믿음의 기둥이 삶을 지탱하는 동안, 누군가는 그것을 신념 삼아 충만한 삶을 살아가고, 또 누군가는 믿음이 무너진 자리에 밀려 들어오는 결핍과 소외를 감당하며 절망 속에 신음한다. 신념은 언제나 실패를 부르고, 무너진 자리는 삼켜지며 또 다른 확신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리고 새로이 쌓아 올린 성은 어김없이 붕괴를 예고한다. 신뢰와 붕괴는 맞물린 두 톱니처럼 한 공간에 존재하면서, 하나가 다른 하나를 추동하며 서로의 위치를 끊임없이 뒤바꾼다. 이 굴레를 놓지 못한 인간은 끝내 절벽에 묶여 독수리에게 심장을 쪼이면서도 다시 돋아나는 심장을 언제까지고 바라보아야 하는 프로메테우스의 운명을 지녔다.

 

이동혁의 회화는 믿음이 무너진 자리에서 시작한다. 그는 한때 신실한 이념의 장소였으나, 지금은 황량하게 버려져 아무도 찾지 않는 폐허가 된 교회를 찾아 헤맨다. ‘현존’(presence)이 부재한 자리에 남겨진 것은 무엇인가? 이동혁은 스러진 빈 공간에서 여전히 꺼지지 않는 미약한 빛을 붙잡고, 어둠의 잔해를 그린다. 신념이 머물렀던 자리이면서 동시에 그것이 사라진 빈자리를 그린다. 

 

그는 종교 안에서 서로를 섬뜩하게 닮아 나와 너의 구분을 잃어버린, 거리가 상실된 마을의 초상을 보았다. 서로를 검열하고 규율하며, 옭아매는 믿음의 구조. 바깥으로의 폐쇄성, 그러나 그 안으로 이어지는 투명성은 거리감을 상실케 하고, 모두를 천편일률적인 가면 뒤로 숨겨버렸다. 이동혁의 〈O를 위하여 2~3〉(2020)은 완벽한 원을 위해 타원형의 달걀에 가해지는 폭력을 은유한다. 오늘날 성전은 더 이상 초월의 집이 아니라, 지나치게 투명해서 서로를 비추고 닮아가는 투명성의 폭력이 되었다. 자기 몸이 잘려 나간 줄도 모른 채, 맹렬히 앞을 향해 달려가며 스스로의 꼬리를 무는 개를 그린 〈게으른 술래 2〉(2018)는 믿었던 것들과 그를 향한 자신의 태도를 되돌아보는 작가의 자조적인 초상이다.

 

그 자체로 완전한 믿음이란 존재하지 않기에, 기둥은 생성부터 균열을 내재한다. 이동혁의 2018년 작업 〈낚는〉은 버려진 교회를 배경으로 그곳에 있던 구조물을 중앙에 쌓아 올린 채, 그 위에서 무언가를 낚는 얼굴 없는 사람들의 도상을 담는다. 조난 당한 배 위의 인간 군상을 그린 〈메두사호의 뗏목〉(1819)을 연상케 하는 이 작업은 희망과 절망이 첨예하게 부딪히는 공간을 그린다. 그들이 궁지에 몰려 낚아 올리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낚는〉이 허망한 믿음을 낚는 사람들의 군상을 보여준다면, 〈갈대 같은 지팡이〉(2017)는 믿는 자의 조용한 절망을 보여준다. 실낱같이 얇은 지팡이에 의지하고 선 노인의 공허한 얼굴은 잔뜩 주름져 있지만, 깨끗한 양복과 구두는 그의 신앙이 예의를 갖춘 것임을 암시한다. 그의 양 손이 붙들고 있는 지팡이는 신의 성전과 경배하는 자들을 구분하는 심판과 질서의 척도이지만, 갈대인 그것은 한없이 가늘고 연약해 당장에라도 꺾여버릴 것만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팡이는 화면의 중앙에 금빛으로 제시된다. 마치 나약한 인간이 가진 한 가닥 실낱같은 희망처럼. 

 

2021년 이동혁은 경기도 화성의 섬, 형도에 있는 버려진 교회를 찾아 헤매다, 그곳이 진작에 사라져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형도는 산을 깎아 나온 흙으로 섬을 메꾼 간척지이지만, 끝내 아무도 살지 못하고 버려진 땅이다. 그는 이미 사라진 교회를 찾던 자신의 여정에서 믿음을 헤매이던 사람들의 모습을 발견한다. 새로운 장소를 찾는 것을 뒤로한 채, 형도에 남아 있던 것들을 떠올리며 교회의 창을 통해 그들이 기다렸을 형상을, 말씀에서 비롯했지만 모두가 다르게 이해하고 다르게 그렸을 형상을 상상해 보기로 한다. 검은 땅 위로 솟아오른, 태초와 종말 사이에 가라앉은 위태로운 형상들을. 그리고 이들은 마침내 지평선의 한가운데서 타오르는 불기둥을 마주한다. 구름을 타고 치솟는 불기둥은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덩굴처럼 빨갛게 타올라 믿는 자들의 가는 길을 인도했을 터였다. 누군가에게는 현존을, 누군가에게는 구원인 이곳은 내면에서 벌어지는 욕망과 투쟁의 장이면서, 신념을 붙잡으려는 희망이 그리는 흔적이다. 그는 희망을 저항의 형식으로 제안한다. 

 

이동혁의 그림은 2023년을 기점으로 다른 궤도에 접어든다. 구체적인 작업의 소재나 주제를 응축하던 제목은 ‘주어진 페이지’(Given Pages)로 고정되고, 커다란 캔버스는 본격적으로 분할되기 시작한다. 이전에는 텍스트로부터 떠올랐던 이미지를 붙잡는 방식이었다면, 이제는 구체적인 성경의 텍스트를 독해하고 그것을 회화로 번역하는 작업에 몰두한다. 성경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듣는 자’들의 서로 다른 문화와 환경, 필연적이었을 인간의 개입은 “선조의 믿음과 지금 나의 믿음은 과연 같은 것인지”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에 도달케 했다. “원본은 특정 문화나 시대의 맥락 속에서만 상대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개념”이라고 말하면서도, 번역될 수 없는 것, 결코 언어화될 수 없는 정동과 텍스트 사이의 빈자리를 표류하며 새로이 재조합되는 의미를 그려나간다. 〈주어진 페이지〉(2019~2025) 연작은 요한계시록을 그만의 방식으로 독해하고 번역한 회화적 대답이다. 압도적인 재앙, 멸망, 종말. 요한계시록은 종말의 서사적 상징으로, 믿음이 부서지는 순간을 진술한다. “빛이 있으라”로 시작하는 창세기는 초월적 심판 앞에 부서져 내리고, 신이 부재한 자리에 피어나는 공포와 경이를 비춘다. 화면에 등장하는 네 기수는 인류사의 반복적인 재앙인 정복, 전쟁, 기근, 죽음을 상징한다. 분할된 화면은 그림 전체를 가로지르는 수평과 수직의 힘을 통해 화면 곳곳에 십자가를 형성하고, 벽의 여백까지도 그림으로 끌어들여 십자가를 품으며 초월적 심판의 날을 현시한다. 촘촘하게 조직된 화면 앞에 반짝이는 촛대의 그림자는 밧줄처럼 그림을 옭아매고, 다중시점을 한데 겹쳐놓았던 캔버스는 마치 자신의 믿음을 다각도로 비추어 보는 것처럼 여러 조각으로 갈라져, 과거 현재 미래를 요동치며 시선의 방향을 흩트린다. 

 

그가 그려온 표면은 언제나 매끈한 무엇과는 거리가 있었다. 서사와 상징을 품고 있음에도, 그것을 화면에 전면으로 드러내지 않고 감추고, 흐려버리고 만다. 이야기는 어둠 속으로 침잠한다. 얼굴 없는 남자의 주위로 수없이 날아드는 비둘기, 목 없는 성가대, 머리가 있어야 할 곳을 중심에 두고 사방으로 뻗어 나온 손과 발. 겹겹이 자리를 차지하고 촘촘히 포개어져, 걷거나 움직이지도 옴짝달싹도 할 수 없는, 그저 쌓여가며 숨 쉬지 못하는 질식의 도상. 뒤엉킨 신체는 묵시록적 풍경을 담은 호추니엔(Ho Tzu Nyen)의 〈지구〉(2009~2017)를 떠올리게 하면서도, 온전한 전체를 상실한 세계에 남겨진 기형적인 형태는 고유한 풍경의 질감을 생성한다. 그것은 단차를, 빛과 그림자를, 나아가 밝음과 어둠이 수없이 교차하는 표면을 이룬다. 말의 육중한 덩어리감과 차갑게 빛나는 금속의 대비는 꿈틀거리는 화면에 기묘한 대비를 이루며 이외의 것들을 배경 뒤로 감추어 버리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은 흐릿하게 잠식되어 있다. 베일에 감추어진 얼굴과 화면 밖으로 숨겨진 저울, 그리고 희미한 빛의 아우라. 그것은 울퉁불퉁하고 어두침침한 화면에서 감각을 곤두세워야 겨우 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가느다란 선을 타고 흐르는, 잠시 빛나고 곧 꺼져버릴 한 가닥 빛을 소중하게 바라보면서, 이것이 내가 살아내는 삶이자 붙잡고자 하는 한 줄기의 대답임을 깨닫는다. 

 

이동혁의 회화는 믿음을 선택할 수 있다고 여기는 인간의 태도와 실제로는 결코 선택할 수 없는 믿음의 불수의적(involuntary) 구조 사이에서 발생하는 균열을 드러낸다. 스스로 소화할 수 없는 거대한 알을 삼키려고 애쓰는 펠리컨처럼, 자신보다 육중한 돌을 켜켜이 쌓아 올리는 믿음은 무너질 수밖에 없는 조건 위에 세워진 연약한 구조물에 불과하다. 안젤름 키퍼(Anselm Kiefer)가 전쟁의 잿더미 위에 신화와 종교의 잔해를 불러내며 절대적 믿음의 파탄을 기록했듯이, 이동혁 역시 믿음의 연약한 지지대를 통해 절대성에 대한 의심과 인간의 불안정한 희망을 드러낸다. 〈배꼽을 메운 1~7〉(2021) 속 위태롭게 쌓인 돌탑과 그 위를 부유하는 가는 빛의 끈은 세계를 환하게 열어젖히는 신의 계시가 아니라,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으려는 가냘픈 흔적이자 흔들리는 신념의 파편처럼 보인다. 그러나 희망은 언제나 빛이 결핍된 자리, 부재 속에서 발생하고, 무너짐의 굴레는 역설적으로 희망의 조건이 된다. 믿음의 다른 이름인 희망은 불가시성과 불안정성 속에서 표류하며 불신과 고통을 먹고 자란다. 빛이 모든 것을 드러내고 가시화한다면, 어둠은 공허와 가려짐, 사라짐의 불가시성 속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품는다. 그것은 질서의 균열을 견디며 버티는 힘이자, 어둠으로 남겨진 여백 속에서 읽지 못하는 진실을 기다리는 ‘번역 불가능성’의 자리다. 

 

14세기 흑사병이 창궐하던 스웨덴을 배경으로 한 영화 「제7의 봉인」(1957)은 십자군 전쟁을 끝내고 귀향하는 주인공 안토니우스 블로크의 여정을 그린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곁에 있었고, 이제 자신을 데리러 온 ‘죽음’에 체스를 제안하며 죽음의 시간을 유예한다. 마지막 대국 앞에서 ‘죽음’은 그 시간이 의미 있었냐고 묻고, 안토니우스는 그렇다고 대답하며 죽음과 함께 길을 떠난다. 그가 마지막 체스판 앞에 앉기까지 두려워한 것은, 죽음을 유예하며 붙잡고자 한 믿음은 무엇이었을까? 모두가 죽어가는 땅에서, 무너진 성전에서 남겨진 자들이 기다렸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두 개의 원반이 교차하는 곳, 땅은 갈라져 끝을 알 수 없는 하늘로 떨어지고, 그 하늘은 다시 무너져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그러나 조각난 하늘은 다시 불완전한 존재들이 살아갈 발판이 된다. 비틀린 시공간에서 이동혁은 그들을 차마 떠나지 못하고 그림으로 불러들인다. 그는 우리가 발 딛고 있는 땅이 얼마나 나약하고 위태로운 것인지를 일깨우는 동시에, 그럼에도 그곳에 집 짓고 살아가는 형상을 그린다. 폐허를 배경으로 하는 그 사람들의 귀신같은 삶을, 상실을 앞에 두고 떠나지 못한 채, 죽음을 유예한 그 언저리를 배회하는 굶주린 개를. 

 

큰 날개를 지닌 기사의 품에서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양을 바라보면서, 그가 보호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생각하고, 그 양은 지켜질 것인지 혹은 속죄양으로서 바쳐질 것인지를 상상한다. 깊은 고독감과 쓸쓸함, 한없는 먹먹함을 느끼게 하는 그의 회화는 빛을 기다리며 폐허 위에 성전을 그려 넣는 불가능한 믿음의 고리를 기록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컴컴한 어둠 속 무언가를 뱉어내던 그림을 생각한다. 물컹한 액체, 매끄럽고 뭉텅한 그 형상은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내가 그를 통해 보고, 그로부터 믿고 싶은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가 폐교회에서 맡았던 비린 비 내음이 이곳에서도 나는 것만 같다.

1 미셸 푸코는 현대사회를 “관찰과 감시의 일상화가 이뤄진 대중사회”라고 보았다. 당대의 사회가 불투명성과 단절을 전제로 개인을 고립시키고 감시했다면, 오늘날의 감시와 통제는 스스로를 드러내고자 하는 욕망을 통해 더욱 내밀하게 작동한다. “주체가 외적인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가발전적인 욕구에 의해서 스스로를 노출할 때, 그러니까 자신의 사적이고 은밀한 영역을 잃게 될까 하는 두려움이 그것을 버젓이 드러내놓고자 하는 욕망에 밀려날 때, 통제사회는 완성된다.” 한병철, 『투명사회』, 김태환 옮김(서울: 문학과지성사, 2014), 96.

2 테오도르 제리코(Theodore Géricault), 〈메두사호의 뗏목〉, 1819, 캔버스에 유채, 491×716cm

3 작가와의 인터뷰, 2025년 9월 7일.

4 이동혁 작가노트, 2024

5 이동혁, 〈비린 지저귐 4〉, 2017, 캔버스에 유채, 162.2×130.3cm

6 이동혁, 〈비린 지저귐 5〉, 2018, 캔버스에 유채, 227.3×162.2cm

7 이동혁, 〈머리 된 자〉, 2017, 캔버스에 유채, 130.3×130.3cm

8  이동혁, 〈주어진 페이지 38〉, 2025, 캔버스에 유채, 53×40.9cm

9  이동혁, 〈주어진 페이지 36〉, 2025, 캔버스에 유채, 2 pieces, each 106×33.4cm

10 이동혁, 〈오늘도 우리에게 2〉, 2020, 캔버스에 유채, 33.4×21.3cm

11 발터 벤야민은 번역을 언어 사이에서 ‘번역 불가능성’을 드러내는 행위로 보았다. 그는 원본이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번역을 통해 ‘순수 언어’(reine Sprache)라는 잠재적 총체를 향해 나아간다고 주장했다. 즉, 번역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언어가 새롭게 살아나는 조건이다. 발터 벤야민,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번역자의 과제 외』, 최성만 옮김(서울: 길, 2008)

12 이동혁, 〈O를 위하여 4〉, 2020, 캔버스에 유채, 200×200cm

13 이동혁, 〈하늘에서도 2〉, 2020, 캔버스에 유채, 130×42cm

14 이동혁, 〈주어진 페이지 49〉, 2025, 캔버스에 유채, 7 pieces, each 106×33.4cm

15 이동혁, 〈주어진 페이지 9〉, 2023, 캔버스에 유채, 4 pieces, each 33.4×21.2cm

16 이동혁, 〈민족의 욕〉, 2018, 캔버스에 유채, 72.5×72.5cm

LEE DONG HY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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