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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에 남아 있는 뉘앙스
이성휘

“사람들은 일찍이, 논리 법칙에 어긋나는 것만 제외한다면 신은 모든 것을 창조할 수 있노라고 말했다.―요컨대 우리는 “비논리적” 세계에 관해서는 그 세계가 어떻게 보일지 말할 수 없을 것이다. 1

감각 - 어느 불가지론자가 찾아간 섬

이동혁은 최근 몇 년 동안 전국 각지에 있는 폐허가 된 교회들을 종종 찾아가곤 하였다. 그가 가장 최근에 방문한 곳은 경기도 화성 형도다. 오래 동안 무인도였던 이 섬은 한국 전쟁 이후 피난민들이 하나 둘씩 들어와 살기 시작했고 주민 대부분은 어업을 생계 수단으로 삼았다. 형도는 약  30여년 전 시행된 시화호 간척 사업 이후 육지와 연결되어 지형적으로는 더이상 고립된 곳이 아니게 되었다. 하지만 지형적인 변화와 환경오염으로 인해 주민들의 필수 생계 수단인 어업이 마땅치 않게 되면서 주민들이 다시 고립감을 느끼는 쓸쓸한 땅이 되었다. 새로운 삶을 찾아 사람들은 떠나기 시작했고 이들이 살던 집 뿐만 아니라 학교, 병원, 교회와 같은 공공 건물들도 버려지게 되었다. 지난 해 이 황량한 형도를 찾아 갔던 이동혁은 자신이 방문했던 어떤 다른 교회보다 더 폐허 그 자체인 형도의 교회 터를 마주하면서,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신에 대한 믿음도 세속의 조건에 의해 쉽게 무너질 수 있는 나약하고 위태로운 것임을 다시금 확인하는 듯 하였다. 그는 한때 신앙에 대해 당연한 믿음을 가졌지만, 지금은 더 이상 우리 삶의 근원은 누구인가, 특정한 종교가 주장하는 특정한 신에게 우리의 삶을 의지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답을 구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고, 폐허가 된 신앙의 장소들을 돌아보며 형체가 없는 것, 실체를 확인할 수 없는 것들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폐허 속에서 감각하고자 하였다.

 

서사 - 신앙의 언어로 말미암아

 

어릴 적 이동혁은 신앙의 말씀에 점철되어 있는, 쉽게 설명되어지지도 않고 이해되어지지도 않는 낯선 용어들에 대해서 히브리 어원을 찾아보거나 그조차도 여의치 않으면 자의적으로 뜻을 헤아려 보곤 하였다. 비슷한 언어를 겹쳐서 생각하기도 하고, 훗날 알게 된 뜻을 예전에 이해했던 뜻과 비교하며 그 간극을 비교해보기도 하였다. 그의 작품에 붙는 제목뿐만 아니라 그림 전반에서 느껴지는 서사성은 낯선 신앙의 언어가 촉발시킨 언어에 대한 끊임없는 의문과 탐구, 그리고 상상을 통한 극복의 과정이라는 정신적 운동에 의해 붙은 습관 또는 굳은 살과 같다. 우리는 신앙이 언어적 차원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 또 신앙의 말씀은 이해하기도 전에 믿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논리 이전의 믿음은 세계에 대해, 또 그 세계를 관장한다고 하는 어떤 초월적 존재에 대해 사고를 할수록 수많은 내적 갈등을 야기시킨다. 비트겐슈타인은 “나는 종교인은 아니지만 모든 문제를 종교적 관점에서 보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며, 종교적 행위의 한 구성요소로서 종교적 언어에 대해 고찰하였고, 말은 종교에 본질적인가에 대해 질문한 바 있다.2  이동혁은 자신의 성장기 전반에 영향을 끼친 신앙의 언어, 그리고 제의를 비롯한 의식적 행위들에 대해서 이제는 중립과 관조의 입장으로 한 걸음 물러나서 바라보고 있지만, 그의 몸과 정신에 체화되고 흡수된 종교적 감각과 지식은 현재 그의 작업 전반의 서사적 배경으로 작동하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종교의 언어나 제의 행위는 표현 자체에 의의가 있으며 그 자체로 원초성과 상징적 본성을 지닐지도 모른다. 이동혁은 21세기의 폐교회라는 현대적인 폐허에서 원시적이고 태초적인 이미지를 찾는다. 이는 작가가 일부러 의도한다기 보다는 그의 의식에 자리잡은 종교의 서사가 원시적이고 태초적인 이미지에서 구축되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형도의 광할한 해안가는 우리가 상상하는 범위 한에서 원시적 자연에 가깝지만 그 황량함은 이곳이 세계의 시작이거나 끝이라고 하더라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쓸쓸하다. 이동혁은 이곳에서 정의할 수 없는 시간을 포착한다. <배꼽을 메운> 연작(2022)에서 지평선 위로 펼쳐진 적보라빛 하늘은 태초의 기운 같기도 하고 종말을 드리운 태양빛 같기도 하다. 또 하루의 시작인지 끝인지 알 수 없고 시간에 대한 우리의 경험은 그림 속 풍광을 바라보며 두시간 사이를 왔다 갔다 진동할 뿐이다.

 

신체 - 창문 너머 지평선 위에서

 

이동혁의 회화에서 배경뿐만 아니라 화면 중앙에 등장하는 도상들 역시 서사를 암시한다. 특정 신앙에 대해 지식이 없더라도 우리는 그 신앙의 상징들이 내포되어 있음을 넌즈시 짐작할 수 있다. 작품의 제목 역시 신앙의 말씀을 연상케 한다는 점에서 서사로 점철되어 있는 그림들이다. 그러나 이미지와 작품제목은 결코 친절하거나 설명적이지 않고 불분명한 서사에 관람자를 놓아둠으로써 심리적으로 모호한 상태로 이끌고 가는데 그럼으로써 평온함보다는 불안과 두려움, 억압과 뒤틀린 것에 대한 감정이 먼저 튀어나오게 한다. 그의 회화적 도상들이 신앙이 현세에서 화려하게 자리했던 시대의 종교화보다는 20세기 초반의 초현실주의가 보여준 언캐니에 가깝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동혁은 도상을 캔버스에 그리기 전에 점토를 이용해 도상의 형태를 먼저 파악하기도 하는데, 이번 <배꼽을 메운> 연작들을 그릴 때도 두 인물이 엉켜 있는 모습을 점토로 작게 제작하였다. 이것은 인물로 볼 수도 있지만, 동물로도 볼 수도 있고, 그 자체를 인간과 비인간을 떠나 새로운 존재에 대한 조각이라고 해도 될 그런 유형의 형상이다.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두 존재의 관계는 한 몸으로 보여지기도 하고, 두 개별자들의 몸싸움 같기도 하다. 이것이 인체이든 동물의 신체이든 간에 머리, 몸통, 팔, 다리라는 구체적인 요소들을 완전히 벗어나지 않았지만 각 부위들이 뭉쳐져 있거나 절단 또는 생략되었거나 하여 완전치 못한 몸의 덩어리들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점토 형상은 어디까지나 참고용일뿐 <배꼽을 메운> 연작에서 캔버스 위에 작가가 그린 도상들은 인류 이전의 신화적 존재, 또는 바위와 같이 지형의 일부처럼 보인다. 특히 작가가 물감을 바르고 깎아 내고 재차 발라서 만들어낸 표면 질감은 이들에게 비인간적인 면모를 부여한다. 그리고 일부는 근경에서 포착한 것 같이 캔버스 프레임에 의해 잘림으로써 형상의 전체 면모는 잘 파악되지 않는다. 형상이 작게 그려진 원경의 모습 또한 시각적 정보가 부족한 것은 마찬가지다. 이 연작들은 마치 낡은 교회에 나란히 뚫려 있는 창 너머로 목격한 광경처럼 보이기도 한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의 시야는 좁고 네모난 창을 통해 밖을 바라봄으로써 제한적이다. 또 형상의 원근이나 스케일이 제각각이기 때문에 바깥의 풍경이 모두 선형적인 시간적 흐름으로 벌어진 광경인지, 시간이 뒤섞여 있는지 알 수 없으며 각 캔버스의 동일한 높이의 지평선만이 실내의 목격자의 시선에 안정감을 줄 뿐이다. 한편, 선홍색에 가까운 붉은 배경에 도상을 가득 채운 그림들에서 시야 폭은 훨씬 좁아지며 일부 그림은 삼차원 공간보다 이차원 평면에 가까운 배경에 도상이 배치되었다. 평면적이되 배경과 도상의 확실한 분리는 배경의 붉은 색의 강한 채도에서 기인한다. 작가는 선명함을 증폭시키는 방법, 즉 붉은 색의 채도를 올리는 방법으로 옅은 색부터 진한 색으로 점점 레이어를 올림 형광에 가까운 느낌으로 발색 효과를 내었다. 이 그림들에서 추상에 좀더 가까워진 배경은 부조처럼 표면 질감이 극대화된 도상과 대립한다. 그럼으로써 돌에 더욱 가까워진 도상은 세계의 중심을 표시하는 돌, 옴파로스 같다. 이 세계의 중심 옴파로스가 있는 창밖의 광경을 관조하는 목격자에게 시간은 회화의 시간에 가까워져 작가의 시간을 가늠해 보게 된다. 그에게 신앙의 공간과 언어는 논리와 서사를 훈련시키고 이미지를 촉발시켰다. 이 이미지는 논리를 뛰어넘고 서사를 횡단하여 초월적인 시간에 대한 심상을 이동혁에게 끊임 없이 불러일으킨다. 황량한 폐허, 그 초현실적인 풍경에서 그는 그 시간들을 곱씹고 열거하는 중이다.

1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이영철 옮김, 『논리-철학 논고』(서울: 책세상, 2020), p. 29.
2 비트겐슈타인은 종교적인 것은 언어의 유일한 본질에 기인하는 본래적인 한계 밖에 있는 것으로 절대적으로 언표 불가능한 것으로 보기도 하였다. 또, 후반 저서에서는 주술이나 제의 행위를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있는 어떤 믿음이나 견해에 의거한다기 보다는, 그러한 행위 표현 자체에 의의가 있으며 그 자체로 만족감을 주는 종류의 행위이며, 종교의 언어에 제의의 원초성과 상징적 본성을 지닌 비유들이 들어있다고하였다.(이영철,“편역자의말/해제”,루트비히비트겐슈타인,이영철옮김, 『미학·종교적 믿음·의지의 자유 및 프로이트에 관한 강의와 대화』(서울: 필로소픽, 2022), pp. 28-34.)

LEE DONG HY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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